“자식인데 부모님 통장에서 돈 좀 빼서 병원비 내는 게 뭐가 문제야”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치매로 의사능력을 잃으신 뒤에는, 자녀라 해도 부모님 예금을 마음대로 인출하거나 집을 처분할 수 없습니다. 은행과 등기소가 본인 확인을 요구하며 거래를 막기 때문입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법적 대리권이 생기지 않습니다.
아내가 요양원에서 일하던 시절, 입소 어르신의 병원비와 시설비를 두고 자녀들이 발만 동동 구르는 모습을 자주 봤다고 합니다. 분명 어머니 통장에 돈은 있는데, 정작 치매가 깊어진 뒤라 아무도 그 돈을 꺼내 쓸 수 없어 형제끼리 돈을 갹출하던 집도 있었다고 합니다. 미리 준비했다면 겪지 않았을 일이었습니다. 재산 관리는 부모님이 판단력이 남아 있을 때 시작해야 합니다.
이 글에서는 왜 ‘가족이니까 알아서’ 방식이 통하지 않는지를 먼저 짚고, 성년후견부터 임의후견·신탁까지 제도별 차이와 선택 기준을 정리하겠습니다. 2026년 현행 기준입니다.
‘가족이니까 알아서’가 통하지 않는 이유
치매가 깊어지면 본인은 더 이상 유효한 법률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계약, 예금 인출, 부동산 매매 같은 행위는 ‘의사능력’이 있어야 효력이 있는데, 의사능력을 잃으면 본인이 한 행위도 무효가 되고 누군가 대신 하려 해도 정당한 대리권이 없으면 막힙니다. 자녀라는 신분만으로는 이 대리권이 생기지 않는 것이 핵심입니다.
실제로 가장 많이 부딪히는 곳이 은행과 부동산입니다. 부모님이 치매 진단을 받은 뒤 큰 금액을 인출하려 하면 은행은 본인 의사 확인을 요구하고, 본인 확인이 어려우면 거래를 보류합니다. 집을 팔아 요양비를 마련하려 해도 본인이 직접 의사표시를 할 수 없으면 등기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병원비, 시설비, 생활비가 당장 필요한데 정작 부모님 재산에는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알아둘 점이 있습니다. 의사능력을 이미 잃으신 뒤에는 뒤에서 설명할 임의후견이나 신탁 같은 ‘미리 준비하는’ 제도를 더 이상 이용할 수 없습니다. 그 시점에 남은 방법은 가정법원을 통한 성년후견뿐입니다. 그래서 준비의 시점이 모든 것을 가릅니다. 판단력이 남아 있을 때와 잃은 뒤에 쓸 수 있는 카드가 완전히 다릅니다.
제도 한눈에 비교: 후견과 신탁
치매 부모님의 재산을 관리하는 방법은 크게 법원이 개입하는 후견제도와, 금융기관에 재산을 맡기는 신탁으로 나뉩니다. 후견제도는 본인의 판단 능력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 그리고 후견인을 누가 정하는지에 따라 다시 네 가지로 구분됩니다. 이름이 비슷해 헷갈리기 쉽지만, ‘판단력이 얼마나 남았는가’와 ‘미리 준비했는가’라는 두 축으로 보면 정리가 됩니다.
| 제도 | 언제 쓰나 | 선임 주체 |
|---|---|---|
| 성년후견 | 판단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된 경우 | 가정법원 |
| 한정후견 | 판단력이 부분적으로 부족한 경우 | 가정법원 |
| 특정후견 | 특정 사안만 일시적으로 지원 | 가정법원 |
| 임의후견 | 본인이 건강할 때 미리 후견인 지정 | 본인이 계약, 법원이 감독인 선임 |
| 신탁 | 재산을 금융기관에 맡겨 관리·이전 설계 | 본인과 금융기관 계약 |
※ 출처: 찾기쉬운 생활법령정보 ‘성년후견제도’, 법원 후견 안내 (2026년 현행)
이 가운데 성년·한정·특정후견은 본인이 미리 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등이 가정법원에 청구해 법원이 후견인을 선임하는 ‘법정후견’입니다. 반면 임의후견과 신탁은 본인이 건강할 때 스스로 미래를 설계하는 방식입니다. 같은 후견이라도 성년후견과 임의후견은 출발점이 정반대인 셈입니다.
크게 보면, 이미 판단력을 잃으신 뒤에는 법정후견(성년·한정·특정)으로 가야 하고, 아직 건강하실 때 미리 준비한다면 임의후견이나 신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같은 ‘재산 관리’라도 시점에 따라 갈 수 있는 길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현재 인지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제도 선택의 첫 단추가 됩니다.
이미 치매가 진행됐다면: 성년후견 신청
부모님이 이미 의사능력을 잃으셨다면 현실적인 방법은 가정법원에 성년후견(또는 한정후견) 개시를 청구하는 것입니다. 본인, 배우자, 4촌 이내 친족 등이 신청할 수 있습니다. 법원은 의사의 진단·감정 등을 거쳐 후견이 필요한지 판단하고, 적절한 후견인을 선임합니다. 후견인은 자녀 같은 가족이 될 수도 있고, 가족 간 다툼이 있으면 변호사 등 제3의 전문가가 선임되기도 합니다.
후견인이 선임되면 금융 거래, 계약 체결, 병원비 지급, 부동산 등 재산 관리를 법적으로 대리할 수 있게 됩니다. 비로소 막혔던 통장과 부동산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알아두실 점이 있습니다. 성년후견은 신청부터 결정까지 보통 수개월이 걸리고, 정신감정 비용 등 적지 않은 비용이 듭니다. 급한 병원비 앞에서 이 시간과 비용이 큰 부담이 됩니다.
또한 후견인은 중요한 재산 처분 시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지속적인 감독을 받습니다. 부모님 재산을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는 안전장치이지만, 그만큼 절차가 따릅니다. 가족 간에 후견인 자리를 두고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년후견은 ‘최후의 수단’에 가깝고, 가능하면 그 전에 미리 준비하는 편이 모두에게 낫습니다.
아직 건강하실 때: 임의후견과 신탁
부모님이 아직 판단력이 또렷하시다면, 훨씬 유연한 선택지가 열려 있습니다. 핵심은 ‘본인의 뜻’을 미리 법적 효력이 있는 형태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임의후견은 본인이 건강할 때, 장차 판단력이 흐려질 경우를 대비해 “그때는 이 사람을 내 후견인으로 삼아 이런 일을 맡기겠다”고 미리 계약해 두는 제도입니다. 이 계약은 공정증서로 작성하며, 실제로 본인의 판단력이 떨어졌을 때 가정법원이 후견감독인을 선임하면 효력이 발생합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맡길지 본인이 직접 정한다는 점에서, 법원이 후견인을 정하는 성년후견과 크게 다릅니다.
신탁은 재산을 금융기관 등에 맡겨 정해진 대로 관리·지급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치매에 걸리면 매달 생활비와 요양비를 자녀에게 지급하고, 사망하면 남은 재산을 누구에게 준다”는 식으로 미리 설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두면 본인이 판단력을 잃은 뒤에도 신탁 계약에 따라 자금이 자동으로 집행되어, 통장이 묶이는 사태를 피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후견과 신탁을 연계하는 방식도 활용됩니다.
한 줄 판단 기준
부모님이 아직 판단력이 또렷하다면 임의후견·신탁으로 미리 설계하는 것이 시간·비용·갈등을 모두 줄이는 길입니다. 이미 의사능력을 잃으셨다면 선택지는 가정법원 성년후견뿐이니, 미루지 말고 바로 청구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가족이 해야 할 일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부모님이 치매 초기이거나 아직 건강하시더라도, 재산 관리 방식을 가족이 함께 의논해 두셔야 합니다. 판단력이 남아 있을 때만 쓸 수 있는 카드가 있고, 그 시기는 생각보다 빨리 닫힙니다. “아직 괜찮으시니 나중에”라고 미루다 시기를 놓치면, 남는 것은 길고 복잡한 성년후견 절차뿐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부모님 명의 재산의 종류와 대략적 규모를 파악하십시오. 그다음 부모님의 현재 인지 상태를 솔직히 살펴, 미리 준비할 수 있는 단계인지 가늠하십시오. 미리 준비할 수 있다면 임의후견·신탁을, 이미 늦었다면 성년후견을 검토하시면 됩니다. 형제가 여럿이라면 한 사람이 독단으로 정하지 말고 함께 의논해 두는 것이 훗날의 갈등을 막습니다.
이 문제는 일반론만으로 결정하기 어렵고, 가족 구성과 재산 상황에 따라 답이 달라집니다. 후견 절차는 가정법원이나 대한법률구조공단(국번 없이 132)에서 안내받을 수 있고, 신탁은 금융기관 상담을 통해 설계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든, 부모님의 뜻을 가장 먼저 존중하고 형제가 충분히 의논해 투명하게 진행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복잡하게 느껴지더라도, 미리 한 걸음 떼어두면 정작 어려운 순간에 가족이 겪을 고통과 다툼을 크게 덜 수 있습니다.
참고 출처
- 찾기쉬운 생활법령정보, 치매 노인 보호 — 성년후견제도
- 대법원 전자가족관계등록·후견, 성년후견·한정후견 개시 청구 안내
- 보건복지부·중앙치매센터, 치매 환자 재산·권리 보호 안내
- 대한법률구조공단(국번 없이 132)